소제목 1: 앞칸과 뒷칸, 단절된 계급이 만들어낸 혁명
소제목 2: 서사 구조의 반전, ‘누가 주인공인가’를 묻다
소제목 3: 생존을 위한 선택, 인간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차가운 열차 안, 가장 뜨거운 질문이 달렸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내가 처음 극장에서 봤을 때, 단순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가 아니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느껴진 그 음습한 분위기, 뒷칸의 차가운 철창과 불쾌한 기내식, 그리고 앞칸을 향한 눈빛들. 나는 그 순간부터 단순히 생존을 위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어떤 ‘질서’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직감했다. 〈설국열차〉는 끝없이 달리는 열차 안에서 계급을, 권력을, 인간의 욕망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파괴적 결정을 담아낸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 영화는 내가 보고 느낀 봉준호 영화 중에서도 가장 상징이 집약된 세계였다. 한정된 공간에서 인간 사회의 전형적인 구조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고, 그래서 더 불편했다. 뒷칸 사람들은 앞칸 사람들을 몰라도 된다. 앞칸 사람들도 뒷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단절’이 문제였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열차 안의 이 분리된 공간이 곧 우리가 사는 사회의 축소판처럼 느껴졌다. 공간은 이어져 있지만, 관계는 끊겨 있다. 마치 현실에서도 누군가는 부유하고, 누군가는 고통받지만, 서로의 고통을 ‘알 필요가 없는’ 구조처럼 말이다.
크리스 에반스가 연기한 커티스는 리더이지만, 결코 완벽한 영웅이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결정의 순간마다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그 고통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 딜레마다. ‘앞칸에 가야 한다’는 그 목표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단순한 복수인가, 혁명인가, 혹은 새로운 지배구조인가. 나는 커티스를 보며 인간이 어떤 이상을 위해 싸울 수 있는가를 자문했다. 그리고 끝에서야 깨달았다. 이 영화는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을 끊어낼 것인가’의 이야기였음을.
〈설국열차〉는 달리는 영화다. 하지만 멈추는 영화이기도 하다. 어딘가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자리에서 끊임없이 맴도는 구조를 보여주며 ‘이 시스템을 끝낼 용기’에 대해 묻는다. 나는 그 질문이 너무 차가웠고, 동시에 너무 뜨거웠다. 이 영화는 얼어붙은 세상에서 오히려 가장 뜨거운 감정을 품은 작품이다. 이제부터 〈설국열차〉 속 계급의 충돌, 서사의 반전, 그리고 생존의 딜레마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 보려 한다.

소제목 1: 앞칸과 뒷칸, 단절된 계급이 만들어낸 혁명
〈설국열차〉의 진짜 주인공은 ‘칸’이다. 이 영화는 열차라는 긴 구조를 따라 진행되지만, 사실은 각 칸이 하나의 세계를 상징한다. 뒷칸은 절망, 중간칸은 환각, 앞칸은 통제와 특권. 이 단절된 공간이 계급의 단면을 시각적으로 그려낸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계급’이란 단어가 이토록 물리적으로 실감 나게 표현된 적이 있었나 싶었다. 열차의 끝에서 시작해 앞칸으로 이동할수록, 세상은 더 조용해지고 깨끗해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조용함이야말로 더 차갑고 잔인한 폭력이었다.
뒷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짐승처럼 다뤄진다. 그들이 먹는 단백질 블록조차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린다. 나는 그 장면에서 진심으로 불쾌했고, 동시에 이 영화가 말하려는 메시지를 단번에 이해했다. 우리가 사는 현실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지금 이대로가 질서’라고 말하지만, 그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는지를 외면한다. 커티스를 비롯한 뒷칸 사람들의 분노는 그래서 너무나 정당하고, 너무나 절박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 혁명이 단순한 전진이 아님을 보여준다. 커티스는 앞칸으로 갈수록 혼란에 빠진다. “우리가 이기면, 그 다음은?” 이 질문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나는 그게 너무 현실적이라고 느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도, 어느 순간 그 체제의 일부가 되기 쉽다. 이상은 있었지만 구체적인 대안은 없었던 것. 그래서 혁명은 때로 그 자체로 또 다른 억압을 만든다. 그걸 보여주는 영화적 장치가 ‘앞칸의 유혹’이었다.
윌포드라는 시스템의 창조자는 커티스에게 말한다. “질서는 유지되어야 한다. 모두가 자리를 지켜야 열차가 굴러간다.” 이 말은 너무나도 익숙하지 않은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진 자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늘 ‘질서’와 ‘안정’을 말한다. 하지만 그 질서의 이면엔 수많은 불평등이 존재한다. 나는 이 대사를 들으며 숨이 막히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 열차는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커티스는 ‘앞칸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가 아님을 깨닫는다. 앞칸에 도달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그때부터 또 다른 계급 구조가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그걸 끊어내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는 결정한다. ‘탈선’하자고. 파괴의 결단. 나는 그 장면에서 처음으로 진짜 희망을 느꼈다. 열차 안에서 아무리 싸워봤자, 여기는 끝이 없는 수레바퀴라는 것을. 변화는 선로를 벗어날 때 온다.
이 첫 번째 주제를 통해 나는 다시금 생각했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건 뒷칸에서 앞칸으로 옮겨 타는 승진이 아니라, 열차를 멈추는 것이다. 그게 바로 〈설국열차〉가 던지는 첫 번째 충격적인 메시지였다.

소제목 2: 서사 구조의 반전, ‘누가 주인공인가’를 묻다
〈설국열차〉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관객의 시선을 철저히 오도하면서도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한다는 점이다. 영화를 처음 보는 우리는 커티스를 당연히 ‘영웅’이라 생각한다. 그는 반란의 선두에 서 있고, 누구보다 뒷칸 사람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커티스의 과거가 드러날수록, 그에 대한 신뢰는 흔들린다. 나는 그 과정을 보면서 ‘주인공’이란 단어 자체가 얼마나 편협한 기준 위에 세워졌는지를 절감했다.
커티스는 과거에 인육을 먹은 사람이다. 그것도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약한 이를 먼저 잡아먹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그 죄책감은 그를 평생 따라다녔다. 아이를 먹으려던 순간, 길리엄(존 허트)이 자신의 팔을 잘라주며 그를 막았고, 그 순간부터 커티스는 인간답게 살고자 결심했지만, 그 기억은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그 고백을 들을 때 영화관에서 몸이 움츠러들었다. 우리의 영웅이, 사실은 괴물이었을 수도 있다는 진실. 그것은 너무 잔인했지만, 동시에 너무 솔직했다.
봉준호 감독은 커티스를 단지 ‘빛의 화신’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는 상처 입은 인간이며, 동시에 시스템에 길들여진 자이고, 그래서 더 위험한 존재다. 앞칸으로 갈수록, 그는 점점 그 시스템의 핵심을 이해하게 되고, 윌포드로부터 “너는 나를 대신할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커티스는 결국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 순간 나는 관객으로서 극도의 긴장을 느꼈다. ‘설마 이 사람이 진짜 새 윌포드가 되진 않겠지?’ 그 두려움은 곧 영화의 가장 강력한 전환점이었다.
이 서사의 반전은 단지 ‘주인공의 과거’가 밝혀진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야기의 구조 자체’를 다시 쓰는 것이다. 처음엔 뒷칸 사람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지만, 실은 그들 모두가 시스템에 포섭되어 있었고, 그 싸움조차 ‘통제된 혼란’이었다는 사실. 난 그 점이 너무 소름 끼쳤다. 혁명마저도 윌포드의 계획 안에 있었다는 설정은, 우리 현실의 정치 구조나 사회 운동까지 반추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통제되고, 분노마저 설계되어 있는 사회. 그 안에서 진짜 자유란 가능한가?
하지만 영화는 그 질문에서 멈추지 않는다. 커티스가 스스로의 과거를 직면하고, 시스템의 중심이 될 기회를 거절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그 순간. 나는 그를 다시금 ‘진짜 주인공’으로 인정하게 됐다. 그의 영웅성은 완벽해서가 아니라, 자기모순과 상처 속에서도 끝내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데 있었다. 이 영화가 말하는 주인공은 더 이상 도덕적 우월자도, 흠 없는 리더도 아니다. 그저 인간으로서 고통을 껴안고, 책임지는 사람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설국열차〉는 전형적인 헐리우드식 구조를 거부한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누구도 악의 화신만은 아니다. 모든 인물은 입체적이며, 그 안에는 시대의 혼란과 인간의 진실이 녹아 있다. 나는 이 복잡한 구조가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단선적 선악 구도에서 벗어나,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디에 서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그래서 더 어렵고,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소제목 3: 생존을 위한 선택, 인간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설국열차〉는 종말 이후의 세계를 다루지만, 그 진짜 공포는 눈에 보이는 폐허가 아니라, 생존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는 인간의 선택들이다. 열차 안은 생존을 위한 시스템이다. 앞칸 사람들은 풍족하게 살고, 뒷칸 사람들은 겨우 숨만 붙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구조는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그게 나를 가장 무섭게 했다. 현실에서도 얼마나 많은 폭력과 차별이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명목 아래 묵인되고 있는가?
영화 후반, 커티스는 윌포드에게서 충격적인 진실을 듣는다. 열차의 균형을 위해 일정한 주기로 인구를 조절해야 했고, 그 방식으로 의도적인 학살이나 폭동 유도가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길리엄과도 ‘암묵적 공조’ 관계였다는 설정. 나는 이 대목에서 인간의 생존 본능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절감했다. 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수단까지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극단의 상황에서는 그 선도 결국 잔인함으로 돌변한다.
나아가 이 영화는 아이들을 다룰 때 더욱 끔찍한 질문을 던진다. 앞칸에서 고장 난 엔진을 수리하는 데 필요한 부품으로 ‘어린아이’를 사용하는 장면. 아이가 팔을 집어넣고 죽음을 감내해야 유지되는 세계. 나는 이 장면을 보고 인간이 어디까지 이기적일 수 있는지를 눈앞에서 목도하는 느낌이었다. 아이 한 명의 죽음으로 수백 명이 산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문명’이 아니라 ‘야만’이다. 나는 이 영화가 인간 문명의 종말을 다루면서, 동시에 그것의 시작이 얼마나 부정의에서 비롯되었는지도 폭로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희망을 말한다. 유일하게 탈출한 두 아이, 예나는(남궁민수의 딸)과 티미. 이 두 존재는 열차 밖의 세상을 처음으로 경험한다. 눈 덮인 설원 위로 걸어가는 그들. 나는 그 장면에서 비로소 숨을 쉬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진짜 생존은 열차 안의 반복된 질서가 아니라, 추위 속에서도 자유롭게 숨 쉬는 공간에 있음을 영화는 말한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남을 것이냐는 질문을 끝까지 던진다.
〈설국열차〉는 종말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는 영화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거창한 계획이나 영웅적 행동에서 오는 게 아니다. 아이 하나를 구하려는 마음, 부조리한 체제를 거부하는 용기, 단 한 발의 희생으로도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야말로 진짜 생존의 조건이라는 걸, 나는 이 영화를 통해 배웠다.

질서를 파괴해야 미래가 시작된다
〈설국열차〉는 한 편의 액션영화로 시작하지만, 엔딩에 다다르면 관객은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어느 칸에 살고 있는가?” 영화는 단순한 계급투쟁이나 미래 디스토피아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되묻는 질문이다. 나는 이 영화가 끝났을 때 단지 영화가 끝났다는 느낌이 아니라, 나에게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를 남겼다는 기분이 들었다.
가장 놀라운 건, 이 열차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스템이 무너지면 모두가 죽을 것이라는 공포, 그 공포가 우리를 열차 안에 붙잡아 놓는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그 공포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오히려, 열차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반전이 영화의 가장 근본적인 철학이라고 본다. 더 이상 ‘질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그 질서를 끊어내는 결단. 바로 거기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역시 수많은 ‘열차’들로 구성되어 있다. 직장, 가족, 정치, 교육… 그 안에는 앞칸과 뒷칸이 있고, 누군가는 엔진을 돌리며, 누군가는 손을 잘리며 연명한다. 영화가 말하는 건 단지 그 구조의 잔혹함이 아니다. 그 구조를 유지하는 우리의 ‘무관심’이야말로 진짜 문제라고, 조용히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나는 지금 이 구조를 그냥 탑승하고 있는가, 아니면 멈추려 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답은 매번 다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반복해서 보아야 할 가치가 있다. 어떤 날은 커티스처럼 분노하게 되고, 어떤 날은 윌포드처럼 지키려 들며, 또 어떤 날은 아이들처럼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어진다.
〈설국열차〉는 냉혹한 세계를 그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을 말하는 영화다. 그 희망은 변화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던지는 마지막 한 장면 — 흰 곰을 보는 두 아이의 눈빛 — 그 눈빛이야말로 이 긴 여정의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인간이란, 진짜 미래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용기에서 온다.
이제,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어느 칸에 앉아 있는가? 그리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