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이 움직일 때 역사가 깨어난다 — 기자들의 윤리와 책임
- 진실은 거리에서 완성된다 — 촛불이 되기 전의 청춘들
- 작은 움직임이 만든 대격변 — 개인의 선택이 시대를 바꾼다
거대한 침묵을 깨뜨린, 가장 인간적인 연대의 기록
영화 <1987>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내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영화는 한 치의 미화도 없이, 그 시대를 있는 그대로 펼쳐놓는다. 하지만 그 안엔 절망보다 더 강한 감정이 있었다. 바로 ‘작지만 용감한 사람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려 했던 연대의 힘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중심으로, 이 영화는 그 진실이 어떻게 은폐되려 했고, 그 은폐를 막기 위해 어떤 이들이 몸을 던졌는지를 하나하나 조명한다. 하정우가 연기한 검사, 유해진의 교도관, 이희준의 기자, 김태리의 대학생 등 다양한 인물이 그려낸 시대의 단면은 한 편의 영화라기보다 ‘기억의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졌다.
내가 특히 집중해서 본 건, ‘거창하지 않은 사람들의 선택’이었다. 이들은 전부 영웅도, 투사도 아니었다. 단지 자기 자리에서 양심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작은 양심이 연결되어 촛불보다 먼저 피어오른 불씨가 되었다. 누군가는 그들을 잊고 살지만, <1987>은 말한다. 그 불씨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숨 쉴 수 있다고.
기억은 단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을 반성하게 하고, 내일을 준비하게 한다. <1987>은 그 역할을 아주 묵직하게 해낸다. 나는 이 영화가 ‘감동적이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이건 분명히 ‘각성’의 영화였다.
지금부터는 <1987>이 내게 건넨 중요한 메시지 세 가지를 나눠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언론의 양심’이 시대를 바꾸는 힘, 두 번째는 ‘거리를 바꾼 청춘들’의 감정과 행동, 세 번째는 ‘작은 개인’이 만든 거대한 전환점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때 그들은 그렇게 했다.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그 질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하다.
1. 언론이 움직일 때 역사가 깨어난다 — 기자들의 윤리와 책임
<1987>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 중 하나는 기자다. 영화 속 중앙일보의 윤상삼 기자(이희준)는 처음엔 그저 한 발 물러선 시선으로 사건을 지켜보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차차 진실에 다가가고, 마침내 진실을 외부로 끄집어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언론의 존재 이유’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나는 이 인물을 보며 실제 역사의 수많은 언론인들을 떠올렸다.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기사로 쓰는 것, 그건 단순히 직업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에 대한 책임이며, 시대를 잇는 윤리다. 영화는 그 점을 짜임새 있게 보여준다. 한 줄의 기사, 한 장의 사진이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그 시선이 분노로 이어지며, 결국 행동이 된다.
우리는 종종 언론에 실망한다. 그러나 동시에, 진짜 언론의 힘이 무엇인지 <1987>은 상기시켜준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보도’라는 것이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행동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 기자들이 움직이면, 역사가 움직인다. 그 진리를 영화는 절절하게 말한다.
2. 진실은 거리에서 완성된다 — 촛불이 되기 전의 청춘들
김태리가 연기한 대학생 연희는 어쩌면 그 시대의 우리 부모님이었고, 선배들이었으며, 동시에 지금의 우리이기도 하다. 처음엔 사건에 무관심하다. 현실은 너무 바쁘고, 삶은 팍팍하다. 하지만 아주 사소한 계기로 그녀의 시선이 바뀐다. 외삼촌의 죽음, 친구의 체포, 캠퍼스 안에서 들리는 비명. 그 순간 연희는 무언가를 이해한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나는 이 감정이 너무 진짜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모두 어느 시점엔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1987>은 묻는다. “그렇다면 그 옆의 ‘또 하나쯤’은 누가 막을 수 있을까?” 결국 진실은 법정이나 신문사가 아니라, 거리에서 완성된다. 거리에서 외친 목소리가 모여야 세상이 듣는다.
영화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보여주며 단순한 감동을 넘어서, 한 시대의 감정을 응축시킨다. 그 수많은 청춘들의 표정엔 분노도, 슬픔도, 결의도 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오래도록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다. 그들은 단지 ‘분위기에 휩쓸려’ 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느낀 진실을 확인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바꾼 사람들이었다.
3. 작은 움직임이 만든 대격변 — 개인의 선택이 시대를 바꾼다
영화 속 인물들은 거대하지 않다. 유해진의 교도관은 작은 교정 시설의 말단 관리인이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인 순간, 한 통의 편지를 전하기 위해 생명을 걸었다. 그 편지 하나가 아니었다면, 사건은 묻혔을지도 모른다. 또 하정우의 검사, 이희준의 기자, 김태리의 학생. 이들은 모두 ‘시스템 안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멈추지 않기로’ 선택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나는 이 부분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았다. 역사란 거창한 담론이나 이념이 아니라,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선택한 ‘작은 행동’들의 총합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정확히 꿰뚫고 있다.
지금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다. 어떤 거대한 변화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위에서 명령하는 것으로 오지 않는다. 아래에서부터의 움직임, 작은 연대, 그리고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쌓일 때 변화는 시작된다. <1987>은 그 사실을 전하려 애쓰지 않는다. 다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장면들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기억해야 할 것은 숫자가 아니라 얼굴들이다
영화 <1987>이 특별한 이유는, 단지 ‘1987년 6월 항쟁’이라는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다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사건 안에서 수많은 얼굴들이 구체적으로 살아 숨 쉰다는 점 때문이다. 박종철의 이름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목소리를 낸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영화에 담겨 있다는 것. 나는 그게 이 영화의 진짜 가치라고 느꼈다.
우리는 때로 역사에 숫자만 남기고, 사람을 지워버린다. <1987>은 그 지워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복원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 질문은 강렬하면서도 따뜻하다. 왜냐하면 그 질문 속엔, ‘우리는 기억하는 존재이며, 그 기억이 사람을 살린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마지막, 수많은 사람이 광장에 모여 외치는 장면은 단순한 연출이 아니다. 그것은 기록이다. 동시에 다짐이다. 어떤 시대든, 그 중심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의 감정이 세상을 바꿨다는 기록. <1987>은 그걸 잊지 말라고 말한다.
나는 이 영화를 누군가에게 추천할 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건 그냥 보면 안 되는 영화야. 마음을 열고, 기억을 안고, 다시 오늘을 바라보게 되는 영화야.” 그리고 그런 영화는 오래간다. 그리고 사람을 바꾼다. 그러니 당신도, 꼭 보길 바란다. 그리고 오래도록 기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