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보다 머리 — 정신이 움직인 승리의 전술
- 인물이 긴장을 만든다 — 대립 구조의 설계 미학
- 바다는 또 다른 전장 — 공간이 만든 전투의 서사

이순신 장군을 다시 '사람'으로 느끼게 한 영화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은 단순한 전쟁 영화도, 역사 교과서식 영화도 아니다. 이건 전술 영화다. 게다가 전략만 잘 짜놓은 차가운 지휘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따뜻한 지휘의 영화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진짜 이순신이 어떤 리더였는지를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만으로도 <한산>은 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역사물에서 이순신 장군은 영웅으로 그려진다. 불굴의 의지, 완벽한 판단력, 승리를 거듭하는 전설. 하지만 <한산>은 조금 다르다. 물론 여전히 그는 강인하고 똑똑하며 지도자로서의 위엄을 갖췄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순신을 무조건 찬양하는 방향이 아니라, 그의 ‘고뇌’와 ‘두려움’, 그리고 ‘책임’에 더 초점을 맞춘다. 그가 사람들을 믿고 움직이기까지, 그 믿음 뒤에 어떤 고민이 있었는지를 그려낸다.
특히 이 영화는 전투보다 그 전의 ‘기다림’과 ‘준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나는 그 점이 너무 인상 깊었다. 흔히 전쟁 영화는 폭발과 전투 장면이 핵심이다. 하지만 <한산>은 물밑에서 벌어지는 정보전, 인내심 싸움, 심리전 같은 ‘비가시적 전투’를 정교하게 다룬다. 그 덕분에 영화 전체에 흐르는 긴장은 훨씬 깊고 묵직하다.
한산대첩은 이순신의 수많은 전투 중에서도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이 영화는 그 승리가 단순히 ‘거북선 덕분’이거나 ‘명장 이순신이니까’라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속에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통찰과 ‘무너지지 않는 정신력’이 있었다는 걸 말해준다. 나는 그런 식의 전개가 훨씬 더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건, 적장 와키자카와의 대립 구도였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돋보이게 만든 건, 그의 적수 또한 입체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적이 강할수록 주인공의 결단이 빛난다’는 공식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다. 덕분에 마지막 전투 장면에서는 단순한 박진감 이상으로, 치열한 두 두뇌의 싸움을 보는 듯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부터 이 영화의 세 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칼보다 머리가 먼저였던 이순신의 전술 전략, 두 번째는 주인공과 적장의 인물 설계를 중심으로 한 긴장 조성 방식, 세 번째는 바다라는 공간이 전쟁의 서사를 어떻게 확장시켰는지에 대한 감상이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 위에 인간과 심리, 공간이라는 요소를 입혀서, 정말 잘 만든 ‘서사 액션물’이었다.

1. 칼보다 머리 — 정신이 움직인 승리의 전술
<한산>에서 가장 놀라웠던 건, ‘싸움’보다 ‘머리싸움’에 더 집중했다는 점이다. 이순신은 전장에 나가기 전까지 참모들과 회의를 거듭하고, 조선 수군 내부의 정치적 충돌까지 조율하면서 ‘싸우기 위한 구조’를 만든다. 영화는 그런 준비 과정을 아주 세밀하게 따라간다.
그가 함부로 화를 내지 않는 이유, 싸움을 피할 줄 아는 용기, 함정에 빠지는 척 연기하는 담대함까지. 모든 것이 철저히 계산된 선택이라는 걸 영화는 반복해서 보여준다. 나는 이 부분에서 정말 진심으로 감탄했다. 지도자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될 만큼, 그의 리더십은 치밀하면서도 따뜻했다.
그리고 ‘학익진’이라는 상징적인 진형이 등장할 때, 그 의미는 단순한 병법이 아니라 ‘신뢰’였다. 병사들은 그 진형 안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각자의 역할을 완수해야 한다. 한 명이라도 어기면 진형은 깨진다. 나는 그 진형이야말로 이순신이 병사들과 쌓은 믿음의 결과라고 느꼈다.
요즘 조직에서 필요한 리더십을 생각하게 됐다. 말로 강요하는 것보다, 판단과 실행으로 보여주는 것. 그리고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도록 중심을 잡는 것. 이순신의 전술은 단순한 병법이 아니라, 심리와 관계의 과학이었다. 그걸 이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감정 없이, 동시에 감동적으로 풀어냈다.

2. 인물이 긴장을 만든다 — 대립 구조의 설계 미학
전쟁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적의 존재감’이다. 만약 적이 무능하거나 평면적이면, 전투는 쉽게 예측되고 긴장감이 떨어진다. <한산>은 이 점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이순신의 상대, 와키자카(변요한 분)는 단순한 ‘악역’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전투를 이해하고 있고, 나름의 정의와 전략이 있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특히 와키자카는 무모하지 않다. 때로는 공격을 피하고, 때로는 조선 수군의 동선을 꿰뚫는 전략을 구사한다. 그래서 그의 등장만으로도 ‘다음 수가 뭐지?’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나는 이 부분이 정말 좋았다. 와키자카가 위협적이기 때문에, 이순신의 결단이 빛나고, 전투가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또한 영화는 이 두 인물의 대비를 통해 리더의 자질을 말한다. 와키자카는 외형적으로는 강하지만 조급하고, 휘하 장수들과의 신뢰 관계가 얕다. 반면 이순신은 때론 느려 보이지만, 그 느림 속에 준비와 신뢰가 있다. 결국, 전투는 사람과 사람의 대결이자, 체계와 체계의 충돌로 그려진다.
나는 요즘 미디어에서 자주 보이는 과장된 ‘악당’ 캐릭터들이 지루했는데, 이 영화는 그 지점을 피하고 깊이 있는 대립 구조를 만들었다. 이순신이 마지막 전투에서 보여주는 ‘정중한 결단’은, 와키자카라는 상대가 있었기에 더더욱 찬란하게 빛난다. 적을 적으로만 보지 않는 서사의 방식도, 인상 깊었다.

3. 바다는 또 다른 전장 — 공간이 만든 전투의 서사
<한산>의 전투 장면은 단순한 액션 연출 그 이상이다. 그 장면들을 보면 바다가 마치 살아있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조용한 수면 아래 흐르는 조류, 지형을 이용한 기동 전략, 바람의 방향까지 계산한 전술 배치. 이 영화는 바다를 ‘전투 배경’이 아닌 ‘전투의 한 요소’로 활용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거북선이 적 함대를 향해 돌진하는 장면이다. 그 순간 바다는 단순히 배가 움직이는 공간이 아니라, 함정이자 무대였다. 지형의 특징과 파도, 밀물과 썰물의 차이를 활용한 전략은 단순한 CG를 넘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나는 그 연출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바다가 전투 공간이면서도 ‘심리 공간’으로 확장된다. 이순신은 바다의 흐름을 읽고, 적의 심리를 파악한다. 와키자카는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읽지 못하고 수면 위에 드러난 것만 보고 판단하다 실패한다. 결국 이 영화의 바다는 단순한 수면이 아니라, 모든 인물의 판단과 심리가 투영되는 전장이었다.
이런 공간 활용은 단순한 전투 영화에서 보기 드문 설계다. 보통은 육지 배경에 단순한 전략만 얹기 마련인데, <한산>은 공간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전투를 ‘서사화’한다. 그래서 전투가 끝났을 때의 감정도 단순한 ‘이겼다’가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해서 이길 수 있었다’는 서사적 만족감이 생긴다.

이순신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영화
<한산>은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영화다. 그는 여전히 위대한 장군이고, 전략의 귀재이며, 조선을 지킨 인물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위대한 이미지에 ‘사람’이라는 본질을 다시 입혀줬다. 고뇌하는 리더, 흔들리지 않기 위해 매일 스스로를 단련하는 사람, 결국에는 신뢰를 통해 군을 움직이는 인물. 나는 이런 이순신이 더 감동이었다.
전투 장면이 아무리 화려하고 거북선이 아무리 강력해도, 결국 역사를 바꾼 건 ‘결정의 순간에 흔들리지 않았던 사람’이다. 이 영화는 그런 ‘결정의 무게’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영웅주의로 흘러가지 않도록 심리와 서사를 촘촘히 엮어냈다.
적장의 존재감, 전장의 리듬감, 인물 간 신뢰의 서사. 이 모든 게 합쳐져서 <한산>은 단순한 전쟁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하나의 전략 서사극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그저 재밌었다고 말하기보다는, ‘깊이 생각하게 만든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순신의 명언들이 다르게 들린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는 말도, 이제는 단순한 투지가 아니라, 철저한 계산과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걸 알게 된다.
<한산>은 한국 영화가 할 수 있는 역사물의 진화 방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너무 상징적으로만 알고 있던 이순신 장군을 다시 ‘가까운 사람’처럼 느끼게 해준다.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가치 아닐까?
그는 여전히 전설이지만, 이제 나는 그를 한 사람으로도 기억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