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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의 고립, 시스템의 공백, 그리고 끝내 도달한 목소리 — 영화 '터널'

by 세리옹 2025.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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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재난보다 무서운 일상 — 외면과 무관심의 그림자
  2. 구조는 시간과 싸운다 — 시스템의 민낯과 현실의 모순
  3.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 — 희망을 붙잡는 인간의 얼굴

한 남자의 고립, 시스템의 공백, 그리고 끝내 도달한 목소리 — 영화 '터널'
한 남자의 고립, 시스템의 공백, 그리고 끝내 도달한 목소리 — 영화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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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그냥 영화’가 아니었다

<터널>을 처음 접했을 땐 그저 ‘재난 영화’일 줄 알았다. 예고편도 그랬고, 포스터도 그랬다. 한 남자가 무너진 터널에 갇히고, 그를 구하기 위한 구조가 시작된다. 익숙한 구조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이건 단지 재난 영화가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이건 우리 모두가 겪을 수 있는 상황이고, 그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말하는 영화였다.

주인공 정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평범한 직장인이었고, 가족에게 돌아가던 중이었다. 하지만 그의 하루는 무너진 터널에 갇히는 것으로 끝난다. 그 이후부터는 생존의 싸움이지만,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기다림’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정수가 견뎌야 했던 건 단지 배고픔이나 갈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잊히는 공포’였다.

터널 밖에선 언론이 들썩이고, 정부는 회의를 반복하고, 구조대는 절차를 따르느라 시간을 소모한다. 그 사이 사람들의 관심은 점점 줄어든다. 정수의 생존 가능성보다 ‘언제쯤 이 사안을 정리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처럼 다뤄지는 현실. 이 부분에서 나는 너무나 현실적인 불편함을 느꼈다. 어쩌면 우리도 정수를 외면했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냉소로 끝나지 않는다. 정수의 아내 세현, 구조대원 대경, 그리고 몇몇 잊지 않은 사람들의 연대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완벽한 시스템이 아니라, 불완전한 사람들이 그 안에서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게 이 영화의 진짜 구조력이다.

지금부터는 <터널>이 던지는 중요한 질문 세 가지를 다뤄보려 한다. 첫 번째는 재난보다 무서운 ‘일상의 무관심’, 두 번째는 구조 시스템의 이면과 그 속도의 모순, 그리고 마지막은 ‘포기하지 않음’이 주는 인간적인 위로다. <터널>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의 절규를, 그리고 그 절규가 끝내 도달했을 때의 울림을 보여주는 영화다.


한 남자의 고립, 시스템의 공백, 그리고 끝내 도달한 목소리 — 영화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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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난보다 무서운 일상 — 외면과 무관심의 그림자

영화 속 정수가 갇힌 터널은 단지 콘크리트와 쇳덩이의 덩어리가 아니다. 그것은 무관심이라는 이름의 일상이다. 처음엔 뉴스가 도배되며 모두가 그를 이야기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사람들의 입에서 그의 이름은 사라진다. 구조 작업에 참여하던 사람들조차 ‘이쯤이면 됐다’는 태도로 변한다.

나는 이 장면들이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진짜 무서운 건 물리적 재난이 아니라, 잊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뉴스 속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던 우리가, 다음 주에는 전혀 다른 이슈에 분노하고 있다는 것. 우리는 익숙하게 외면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터널>은 그런 일상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아무도 악하지 않지만, 모두가 한 발 물러서 있다. 책임은 서로에게 미루어지고, 그 사이 시간이 흐른다. 그 시간이 쌓일수록 정수는 더 깊이 고립된다. 영화는 말한다. “그건 누구라도 될 수 있다.” 나는 그 메시지가 너무 날카로워서,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한참 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한 남자의 고립, 시스템의 공백, 그리고 끝내 도달한 목소리 — 영화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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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조는 시간과 싸운다 — 시스템의 민낯과 현실의 모순

영화는 구조 작업의 긴박함보다, 그 속도와 결정의 비효율을 더 강조한다. 터널이 무너진 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언론이었다. 그리고 그 뒤엔 정치와 여론이 있다. 구조는 그 다음이었다. 이 영화는 그 순서를 비판한다. 왜 가장 중요한 것이 가장 늦게 반응하는가?

대경은 구조대의 리더로서 현실의 모순을 가장 뼈아프게 겪는 인물이다. 그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원칙 하나로 움직이지만, 위에서 내려오는 결정은 늘 너무 늦다. 나는 그가 회의실에서 말없이 앉아 있는 장면이 가장 가슴 아팠다. 그는 많은 걸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시스템은 사람보다 체면을 먼저 생각한다.

이 영화는 기술적인 한계가 아니라, 결정하지 못하는 ‘태도’의 한계를 날카롭게 보여준다. 구조는 단지 포클레인이 움직인다고 이뤄지는 게 아니다. 누군가의 의지, 누군가의 판단이 그 앞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판단이 늦어질수록, 생존 가능성은 줄어든다. 나는 <터널>이 그 단순한 진실을 가장 아프게 전달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한 남자의 고립, 시스템의 공백, 그리고 끝내 도달한 목소리 — 영화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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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 — 희망을 붙잡는 인간의 얼굴

정수를 살린 건 구조 기술이 아니다. 그를 살린 건 결국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세현은 남편이 살아 있을 거라고 끝까지 믿는다. 모두가 포기하라고 말해도, 그녀는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나는 이 인물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느꼈다. 그 믿음은 무모함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구조대장 대경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무뚝뚝한 말투와 행동 속엔 분명한 원칙이 있다. “사람은, 살아 있으면 구해야죠.” 이 말 한마디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그리고 그 원칙은 끝내 정수를 밖으로 이끈다. 내가 이 장면을 보며 울컥했던 건, 그 장면이 극적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조용해서였다. 이 영화는 감정을 부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더 뼈에 박힌다.

세상은 언제나 누군가를 포기하도록 유혹한다. 그게 더 편하고, 빠르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터널>은 말한다. 진짜 인간다움은, 그 모든 유혹 앞에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동시에 마음 한 켠이 아릿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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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도달한 목소리,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온몸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 무게는 불편함이라기보다, 반성이었다. <터널>은 단지 생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목소리에 관한 이야기다. 그 목소리를 얼마나 오랫동안 듣고 있을 수 있느냐, 혹은 그 목소리를 끝내 듣지 못한 채 지나치느냐의 이야기다.

정수는 구조된다. 하지만 그가 구조되기까지 너무 많은 것들이 지나간다. 시스템, 언론, 정치, 여론. 그 모든 것들이 때론 방해가 되기도 했고, 때론 무력했다. 하지만 몇몇 사람이, 아주 조용히 움직였고, 그들이 만든 균열이 정수에게 닿았다. 나는 그 균열이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많은 정수들이 있다. 구조되지 못한 채, 외면당한 채, 그저 버텨야 하는 사람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더는 외면하기 어려워진다. <터널>은 그런 영화다. 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영화.

우리는 매일 터널을 지나간다. 물리적인 터널만이 아니라, 감정의 터널, 사회의 터널, 관계의 터널. 그 안에서 누군가가 갇혔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 가족, 내 친구, 혹은 바로 나일 수도 있다.

<터널>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목소리, 끝까지 들어야 한다. 그래야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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